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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안에서/Poem & Photo

칸나

by 緣海 2008. 5. 1.

칸나 / 윤순정

 

젊어서 슬픈 여자들의 무리

아예 얼굴은 땅 속에 박고 거꾸로 섰다 

하늘바라기하며 수없이 돋아나는 클리토리스

철갑처럼 걸쳤어도 도무지 가려지지 않는 치마

8월의 2차선 도로를 질주하는 수많은 사내들

그 빛깔 너무도 강렬하여 아예 실눈을 떴다

눈, 코, 입 땅 속에 묻혔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다

염천의 폭염에도 그을리지 않는 여자들의 얼굴

단순 질주하는 사내들이 가여워

눈물은 대지를 적시고 구름이 되어 비를 불러오는가

젊어서 슬픈 여자들의 무리

가려지지 않는 치마와 치마 사이로

하늘바라기하는 저,

열아홉살의 곱디고운 순.

 

 

칸나 / 오규원

 

칸나가 처음 꽃을 핀 날은
신문이 오지 않았다
대신 한 마리 잠자리가 날아와
꽃 위에 앉았다 갔다

칸나가 꽃대를 더 위로
뽑아올리고 다시
꽃이 핀 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다음날 오후 소나기가
한동안 퍼부었다.




칸나의 동공은 밤에도 열려있다  / 緣海

 

하늘 빛 푸르고 폭염 눈부셔 실눈 뜬 강화 해변

비틀거리는 발걸음 끈적한 대기를 헤쳐 오면

저리도 힘겨운 능선과 비탈마다에는

잠못 이루어 빨개진 눈으로 8월의 태양을 응시하는 눈자위들

들뜬 눈동자엔 신열이 들끓고

바다와 육지사이를 돌고 돌아

언제나 제자리에서 고독한 불면의 영혼들

생각이 넘쳐 잠들 수 없는 뒤척임의 가슴들

칸나의 동공은 밤에도 항상 열려있다

 


 

칸나 / 오세영

아무 일도 없었던 듯
---- 하늘은 말갛게 개어 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 땅은 이슬에 촉촉히 젖어 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 벌떼 잉잉거리고
---- 나비 펄펄 날고
아, 그러나 누가 흘려 놓았나
푸른 초장(草場)의 한방울
붉은 피.
어젯밤
달님일까, 별님일까.
한 점 선연한 초조(初潮)의
흔적.



문상가는 길 / 도경숙

 

사차선에서 이차선으로 접어들었다.

창밖은 공장 굴뚝에서 힘차게

피어나는 연기가 내려 앉은듯

온통 회색빛으로 흐린 눈을 가린다.

 

축축한 바람으로 인해

몸은 더 끈적거리며 조여오는데

족히 무거우리만큼 먼지를 뒤집어 쓴

넓은 이파리의 칸나

나를 비웃듯이 정렬의 빛으로

태양을 찾고 있다.

 

구불 구불 고갯길

가신 님의 인생 역정을 달리고 있다.

그나마 띠엄 띠엄 저항없이 하늘거리는

이름 모를 들꽃이 나를 위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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