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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안에서/Poem & Memory

만해 생가 여행기

by 緣海 2008. 4. 8.
 


Ⅰ. 여행 스케치

  내가 좋아하는 가수 중에 “여행스케치”라는 그룹이 있다. 이들이 펴낸 제1집 음반 중에 실려 있는 [여행스케치]라는 노래를 듣다보면 여행을 떠나기 앞서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여행 중에 들을 수 있을 법한 소란스러운 대화들로 간주를 대신하고 있다. 서로 미루다 쌀을 안 가져와서 모두 굶게 된 상황에서 배고프다고 소리치는가 하면 그래도 즐거워서 웃는 소리 등 여행의 설레임과 감동이 짤막한 소음의 배경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여행은 그래서 떠나기 전 준비할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 아닌가 한다.

  만해 생가를 방문하는, 짧지만 의미 있는 이번 문학기행에서도 사실 준비는 많이 했었고 그 준비기간이 본 여행 때보다도 더 즐거운 기대감으로 들뜬 시간들이었다. 우선 일차적으로 예비답사를 했었고, 점심 먹을 장소를 찾아 남당리 횟집에 가서 시식을 해보았다. 또한 왕복시간 체크, 더 나은 장소를 찾아 간월도로 식사장소 변경, 차량이 두 대 이상 움직일 경우에 대비하여 무전기 두 대 준비, 그리고 배터리 충전, 소형버스의 렌트 문의 등 바쁜 시간을 쪼개어 움직인 준비과정이었지만 나름대로 완벽하게 준비는 갖추었다. 그런데 막상 떠나는 날이 되자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함께 하지 못하는 문우들이 많아 7인승 자동차 한 대로만 출발하게 된 아쉬움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아쉬움들은 자동차가 출발하면서 모두 잊혀지고 자연스럽게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에 장단을 맞추기도 하고, 새 옷의 연록과 상록수의 진록이 어우러지며 차창으로 흘러가는 강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기도 하며 오로지 떠난다는 즐거움에만 모두들 몰두해 있는 듯 하였다. 다행히도 우리일행 일곱명이 모두 같은 세대라 할 만큼 음악이나 문학에 있어서 취향이 같았다. 물론 동행하신 교수님도 마음만은 항상 청춘이시니 이런 저런 대화에 하나도 막힘이 없었고, 사슴농장이 있는, 공주로 통하는 터널을 지날 때나, 노란 유채꽃이 피어있는 시원한 금강변을 따라 질주할 때나, 여우고갯마루에 있는 구기자 동동주 공장을 지날 때나, 칠갑산 대치터널을 지나 튤립이 잔뜩 피어있는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 등 언제나 대화를 주도하고 때로는 아슬아슬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돋구어 주셨다. 날씨마저 비가 온다는 예보와는 달리 적당한 햇살과 적당한 그늘로 훌륭한 조명기사의 역할을 다해주고 있었다.


Ⅱ. 절의 바다, 인연의 바다

  누가 인생을 빗대어 나그네길이라 한탄했던가. 우리네 인간들은 움직여야만 살 수 있는 動物이기에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어디론가 달려가야만 하는 운명인 것은, 쫓아만 가던 사자의 흔적본능인가 아니면 달아만 나던 초식동물의 흔적본능이던가? 설악산 미시령고개에서 눈길을 헤치고 갈 때나, 신천강에 비친 치악의 봉우리를 바라보며 갈 때나, 두타산의 무릉계곡을 탐험한 뒤 백복령의 구빗길을 따라 산을 옮겨가며 오르내릴 때나, 바래봉의 철쭉을 찾아 정령치 성삼재 등 지리방장의 고개를 누빌 때나 구분 없이 언제나 확인 불가능한 무언가를 찾아 움직였다면, 천장호를 바라보며 칠갑의 대치봉을 넘는 오늘 난 과연 무엇을 찾아 길을 나선 것일까. 만해 생가에 내가 찾아낼 그 무엇인가가 과연 있기나 할까...

  어느덧 자동차는 광천을 넘고 결성을 지나 목적지를 향하여 마지막 우회전을 하였다. 길가에 목적지가 가까웠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고 저 멀리 온통 푸르게 우거진 산밑에 초라해 보이는 초가가 한 채 보인다. 생가라 하기에, 도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인가가 밀집한 시골 촌락정도는 예상했었다. 그런데 이건 무엇인가. 산밑에 외딴집, 달랑 초가삼간 한 채. 순간적으로 어릴 적 내가 자랐던 고향의 초가집과 너무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집 마루에 앉아있는 눈이 초롱한 소년, 눈을 들어 먼 산 바라보며 긴 봄날의 끝을 기다리던 어릴 적의 내 모습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 소년은 님의 침묵을 노래하던 시인이요, 손 모으고 시간 위에 앉은 부처요, 돌아서면 민족과 조국의 독립투사였다. 나는 많은 생각을 한 뒤에 내 마음속에 만해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더 많은 생각을 한 뒤에 만해를 내 마음 속에서 지워버렸다. 어린 시절의 만해를 그 집에서 만난 것은 전혀 뜻하지 않았던 소득이었다.

  돌아 나오며 다시금 생가를 바라보았다. 절의 바다는 인연의 바다였다.


Ⅲ. 간월도(看月島)

  간월(看月)이란 말 그대로 달을 쳐다본다는 뜻이니 간월도는 달을 바라보는 섬이란 의미일게다. 누가 간월도에서 달을 바라보았겠는가. 술 한잔에 풍류를 싣고 낙화유수, 인생을 노래하던 시인 묵객은 아니었을 것이다. 거친 바다와 쪽배 하나로 싸워가며 팍팍한 인생을 살아가던 어부들이, 새벽에 간월도 포구에서 출조를 하며, 원망과 한이 서린 서해 낙월을 담은 술 한잔을 비우면서, 내일도 저 달을 쳐다볼 수 있게 해달라고 염원하며 붙인 이름이었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서산A지구 방조제 입구에 있는 간월도는, 머리위에 소나무 몇그루를 이고 달이 그 위에 뜨면 어울릴 것 같은 바위섬으로 되어있고, 간조 때면 걸어서도 건널 수 있게끔 길이 생긴다. 큰길에서 벗어나 간월도로 접어드는 길은 좁고 비포장이며 좌우로는 횟집과 주차된 자동차들이 즐비하다. 이 길을 따라 맨 끝에 있는 포구로 접어드니, 바다로 잠겨드는 선착장 좌우로 배로 된 횟집들이 바다에 둥둥 떠 있다. 그 횟집중 한 곳의 주인이 이번에 동행한 문우중 한 명의 초등학교 동창생이라서, 그 집에 들어가서 회와 한 잔의 술로 운치가 가득한 점심을 마친 후에, 나중에는 배까지 얻어 타고 간월도 일주를 하였다.

  초등학교 졸업이후 처음 만난다는 그들 동창생들의 상봉 장면이 싱거웁다. 한쪽은 얼굴은 생각난다 하였으며, 한쪽은 얼굴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 했다. 하긴 한쪽은 남자요 다른 한쪽은 여자였으니 얼싸안고 눈물 흘리는 상봉장면을 상상했던 것이 애초에 잘못이었다. 나이 열 서넛에 졸업을 하며 헤어졌을 터이니 삼십년이 지난 후에 늙어버린 얼굴에서 그 옛날의 얼굴을 찾아낸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일 것이다. 더구나 그 삼십년 동안에 익히고 사귄 얼굴들이 몇몇일 것인가.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이려니 인연이 있으면 만나고 인연이 다하면 헤어질 터이다. 삼십년 만에 다시 만난 그들의 인연은 몇 겁의 세월이 쌓여진 인연일 것인가. 우리들이 술 마시며 한나절을 보낸 간월도 앞바다 또한 인연의 바다(緣海)였다.


Ⅳ. 귀로(歸路)

  크든 작든 여행은 돌아오도록 되어있다. 만일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이 있다면 그것은 생의 마지막 여행이 될 것이다. 그와 함께 쌓였던 인연도 운명을 다하게 될 것이니 인연이란 그때의 것일 뿐, 지나고 나면 미련만이 남게 된다던가? 98세의 수필가 피천득님이 TV에 출연하여 자작 수필 "인연"의 주인공이 80대의 나이로 일본에 생존해 있으니 만나기를 원하는지 물으니 노 수필가께서는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그분이야말로 평생동안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을, 대표작의 주인공 아사꼬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어찌 없었으랴만은 그 인연이야말로 흘러간 인연일 뿐이었을 것이다. 그분의 머릿속에 남아있을 젊고 아름다운 아사꼬의 모습을 다 늙은 아사꼬의 모습으로 흐려놓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만해의 흔적을 찾아서 생가를 찾은 이번 문학기행도 이제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 간월도를 출발하여  홍성을 거쳐 대전으로 돌아오면서 이번 여행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이제 이 땅에 만해는 없었다. 만해가 어릴 적 숨쉬고 거닐었을 생가에도 관리소장과 내방객과 벌 나비만 붐빌 뿐, 평범한 초가의 그 어디에도 만해는 없었다. 아니, 이제는 이 땅에 만해가 필요 없는 지도 몰랐다. 그러나 만일에라도 다시 이 땅의 국운이 쇠하고 이민족의 침탈을 받는 날, 제2, 제3의 만해가 계속 생겨날 것이다. 그것이 만해의 생가에서 어릴 적 내 모습을 보았던 이유일 것이다.


Ⅴ. 卍海 緣海


보아요

당신을 찾아 천리 먼길 찾아온 날

당신은 티끌이 되어 천지간에 날리고

당신은 물이 되어 조용히 우물 속에서 거울처럼 비추고

당신은 어릴 적 내 모습 되어

툇마루에 앉아 목마르게 동구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믿어요

언제라도 이 나라 이 민족에게 시련이 닥치는 날

당신은 탁발승 되어 경건으로 민중을 깨우치고

당신은 시인이 되어 풍자로 불의를 준엄히 꾸짖고

당신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아

다시 일어설 때까지 독립투사처럼 굳건히 지켜보리란 것을


당신이 마음 속에 부처를 모시고

절로써 바다를 만들리라 소원하셨다면

그 소원, 그 바다는 인연의 바다로 이루어져

당신과 나를 묶고

그들과 우리를 엮고

그때와 지금을 잇고

그곳과 이곳을 한데 머금었나니

당신은 나룻배처럼 행인을 맞이합니다


내 안에 당신을 그려 넣었습니다

당신을 가져가고 싶었습니다

내 안에서 당신을 지웠습니다

앞으로는 당신이 필요 없었으면 합니다

단지

한 아버지로만 당신을

만났으면 합니다


당신을 보고 갑니다

당신을 듣고 갑니다

당신을 찾아 천리 먼길 찾아온 날

당신은 어릴 적 내 모습 되어

툇마루에 앉아 다 큰 나를 배웅합니다


2003. 5. 26    황호신...

 


 


 

버들강아지하늘하늘"맑은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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