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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안에서/Essay & Photo

논의 사계

by 緣海 2011. 6. 8.

[논] - 논의 사계

 

 

 

 

 

[봄철의 논]

 

농가월령가 4월령에는 논에 관한 한 귀절이 나온다.

'무논을 써을이고 이른 모 내어보세'

과연 봄철의 논에는 무논을 써래질하여 이른 모를 낸 논이 절경이다.

남녀노소 골몰하여 집에 있을 틈이 없는 지경에 경치가 눈에 들어왔으랴마는

'적막한 대사립을 녹음에 닫았도다'

이무렵에는 농촌 마을 어디를 가도 바쁜 농삿일로 사립문을 닫고

녹음속에 적막한 농가에는 개들만 집주인 대신 집을 지키고 있다.

 

논은 우리 선조들의 일터이자 삶을 이어가는 약속의 땅이었다.

우리 아버지들의 사무실이자 출장지였고, 식당이었고 만남의 장소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아침이면 논으로 출근을 했으며, 저녁에는 논에서 퇴근했다.

여름 한철, 땡볕이 정수리를 내리쬘 때 잠깐의 휴가가 주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농번기의 모든 시간들은 논에서 소비되어지고 논에서 정산되었다.

 

봄철의 논일은 겨우내 묵혀두었던 논을 갈아엎는 일부터 시작된다.

무성히 자란 뚝새풀은 쟁기 보습날을 맞아 땅속으로 갈려 들어가고,

여기에 물을 대어 무논을 만들고 써래질하여 모내기 알맞은 논을 만든다.

못자리에서 모를 쪄내 한묶음씩 논 여기 저기 던져놓고 모내기에 들어간다.

농촌에 사람이 많던 시절에는 논 양 뚝에서 줄 띠는 사람이 따로 있었는데,

사람이 부족하게 되면서부터는 맨 가에서 모내는 사람이 그 일을 겸하기도 했다.

그 시절 물논에 거머리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정신없이 모내다 보면 종아리에 몇마리씩 달라붙어 피를 빨고 있기 일쑤였다.

기계로 못자리를 하고, 역시 기계로 모내기를 하는 요즘에는 그런 풍경들을 볼 수 없어서 아쉽다.

 

 

 

 

 

 

 

 

 

 

[여름철의 논]

 

농가월령가 유월령에 나오는 논에 관한 귀절들을 모아보면,

'지력을 쉬지 말고 극진히 다스리소, 젊은이 하는 일이 김매기 뿐이로다.'

'논밭을 갈마들며 삼사차 돌려 맬 제, 그중에 면화밭은 인공이 더 드나니'

'땀흘려 흙이 젖고 숨막혀 기진할 듯, 때마침 점심밥이 반갑고 신기하다'

'오조 이삭 짐작하면 양식 걱정 오랠소냐, 해진 후 돌아올 제 노래 끝에 웃음이라'

여름논에는 구름의 그림자만 오갈 뿐 사람 그림자가 드문 드문하다.

단 보리술 한잔에 그늘에서 단잠 청하니, 이삭 숫자 헤아리는 마음에 흡족한 미소가 떠오른다. 

 

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생태계이다.

그 안에서 온갖 식물과 동물들의 한해살이가 이어지고,

이는 다음해에도 이어져 대대로 논에만 기대어 살아가는 생물종이 있을 정도다.

논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숲이다. 그 숲은 정글이 되어 온갖 동식물의 서식처가 된다.

논은 습지다. 벼 뿐만이 아니라 많은 습지 식물과 거기 의존하는 동물들의 낙원이다.

논은 전쟁터다. 농부들이 원하지 않는 타 식물들을 추방하려 김매기를 하고,

농부들이 바라지 않는 곤충과 동물들을 내쫓으려 쫓고 쫓기는 신경전이 벌어진다.

요즘들어 제초제와 살충제로 일거에 몰살시키는 시스템은 가진 자 인간의 횡포다.

늘 가진 자가 더 가지려 욕심을 부리는 것은 인간이 버려야 할 나쁜 유전적 인자이다.

요즘 들어 각광받는 유기농과 웰빙 농법은 아파보고서야 깨닫는 농사의 반성이다.

 

여름철 논은 개구리논이다. 비라도 올것 같으면 일제히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목청좋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 들으며 저녁을 먹었다.

곤충이 많기 때문에 개구리가 많고, 개구리가 많은 논에는 당연히 뱀도 들끓었다.

논 한가운데 외딴집이던 옛 집에는 부엌과 뒤란 사이 도랑이 깊었다.

집 주변에 수없이 많던 뱀들을 잡으려 어느날 아버지는 낫을 들고 나서셨다.

도망친 뱀도 수두룩 하지만, 그날 잡힌 뱀들은 가마니로 담아져서,

깊은 병을 앓던 이웃집 아저씨에게로 보내졌다. 

낮에 이글대는 태양이 무슨 대수랴, 원두막에 누워 한 숨 자다보면 어느덧 석양,

'원두밭에 참외 따고 밀 갈아 국수하여, 가묘에 천신하고 한때 음식 즐겨 보세'
농가월령가대로 그렇게 긴 여름날은 천천히 저물어 갔다.

 

 

 

 

 

 

 

 

 

 

 

 

 

 

 

 

 

 

[가을철의 논]

 

농가월령가 9월령에는 논에 관한 구절이 많이 나온다. 그중 몇 구절을 골라보면,

'구월이라 늦가을 한로 상강 절기로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기러긴 언제 왔나'

'경치는 좋거니와 추수가 시급하다, 들마당 집마당에 탈곡기구 차릴세라'
'물논은 베여 깔고 마른논벼 곧두드려, 오늘은 정근벼요 내일은 사발벼라'
'밀따리 대초벼와 등트기 경상벼라, 한동네 이웃하여 한들판에 농사할 제'

'수고도 나눠하고 없는 것도 서로 도와, 이때를 만났으니 즐기기도 같이 하세'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 가을 논은 그렇게 탈곡 준비로 분주해졌다.

풍년가가 절로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도와 가을걷이에 여념이 없다.

 

논은 역사이다. 우리 민족의 삶의 발걸음이 어떠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그들의 땀방울이 스며든 논은 그들의 숨소리와 발소리가 더해져 무언의 역사가 되었다.

봄부터 겨울까지 수없이 많은 그림자들이 왔다가는 가고,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태어나고 사라졌다.

그렇게 해마다 되풀이 되는 생명의 윤회가 겹치고 또 겹쳐져서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되었다.

미처 역사로 이루어지지 않은 논의 진실은 농부들의 입을 통해서 지혜가 되어 농부들의 머리속에 각인되었다.

논의 역사, 그것은 농부들의 역사를 넘어 우리 민족의 역사였으며, 대대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역사인 것이다.

 

가을철 논은 황금빛 물결이다. 오곡백과로 표현되는 온갖 곡식들이 완성되는 현장이다.

한 해동안 땀흘렸던 수고로움이 알알이 결실 맺혀지는 풍요의 현장이다.

온갖 속담과 경구들이 논에서 태어났다.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를 통해 부지런 할 것을 깨우쳤으며,

농작물은 주인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속담을 들으며 날마다 논을 찾았다.

백중날은 논두렁 보러 안나간다는 속담을 유념하여, 음력 7월 보름에는 닭, 개 등을 잡아 일꾼에게 먹였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속담을 실감하며 가을 농번기에 일손을 재촉했다.

메밀꽃 필 때는 동서 집에도 가지 마라는 등의 속담으로, 농촌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에는

이웃집 방문을 자제하여 부담을 주지 않는 미풍양속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겨울의 논]

 

어부들에게 어부사시사가 있다면, 농부들에게는 농사월령가가 있다.

농사월령가에서는 겨울철에 농가에서 해야할 일들로 김장할 것과 자녀 혼사에 신경 쓸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다음 해 농사를 위해 준비할 것과, 음식을 만들어 이웃과 함께 정을 나눌 것도 언급하고 있다.

방한지책으로 방고래 구두질, 바람벽 맥질하기, 창호지 바르고 쥐구멍 막으라 한 대목에서는 그 섬세한 준비성에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가을에 수확한 채소, 곡식들을 얼지 않고 썩지 않게 갈무리에 정성을 다 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바쁜 농삿일에 잠시 소홀했던 부모 봉양에 최선을 다하라고 교훈하고 있으며,

자식 걱정으로 부모가 잔소리를 하더라도 중중거려 대답하지 말고 화기로 풀어내라고 교훈을 주고 있다.

남남끼리 모였다 하면 하는 남 얘기에 귀기울이지 말고, 내입부터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있으니,

이는 농사월령가로만 유용한게 아니고 세상사에 유효적절한 교훈으로 간직하면 좋을 글귀들이다. 

 

논은 권력이다. 논을 가진 자, 세상을 지배했으며, 논이 없는 자는 세상에 종속당했다.

농자 천하지 대본이던 시대, 논은 정치였으며, 논에서 탄생한 권력은 나라를 지배했다.

당연히 논 등 토지를 둘러싸고 수많은 법안과 제도들이 탄생했다가 고쳐지고 또 없어지곤 했다.

신라시대의 녹읍, 고려시대의 전시과 제도, 과전법 등 한 시대가 바뀔 때마다 토지제도도 함께 바뀌었다.

그만큼 한 나라의 정체성은 토지제도의 형태 여하에 따라 규정되거나 달라지곤 했던 것이다.

 

겨울논에 조용히 눈이 내린다.

할 일을 다 마친 논은 깊은 휴식을 취하는 듯, 눈속에 묻혀 말이 없다.

그러나 논은 내년을 위해 암중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저 깊은 땅 속에는 수많은 생물들이 함께 겨울을 나며 다시 치열하게 전개될 내년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논은 문화이다. 도시가 문명(civilization)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농촌은 문화의 시발점이다.

문화(culture)의 뜻이 경작에 있음은 서양사를 배울 때 익혔던 내용이다.

수렵과 채집으로 연명에 급급하던 인류는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비로소 안정된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무계획적이고 일시적이고 충동적이던 식량의 조달 방법이 계산과 계획에 근거한 방법으로 바뀌어갔다.

농경이 인류를 얼마나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는지 생각해 보자.

우선, 씨 뿌리고 김매고, 수확하는 적기를 알기 위해 필연적으로 역법이 발달해야 했다.

달력의 발달은 농경뿐만 아니라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분야에 고루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수리시설과 치산 치수의 필요성으로 인해 건축과 토목이 발전하게 되었다.

남은 잉여 생산물의 저장과 분배의 필요성으로 인해 정치 사회의 일반적인 분야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지식과 지혜를 서로 나누고 기록하기 위해 문자 언어학이 태동하게 되었다.

언어와 문자의 발달은 수학, 문학 등 고전적인 학문에서부터 현대의 전산, 통계 등 고도의 학문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을 현재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맨 처음 시작점, 그곳이 바로 논인 것이다.

 

맨처음 농경이 시작된 그 모습 그대로 아직도 남아있는 화석같은 곳, 그 논에 다시 봄이 돌아왔다.

겨우내 묵혀졌던 논은 갈아 엎어지고, 저 논에 다시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앞으로 어느정도의 세월이 흐르던간에 인류는 결코 논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도시와 공장으로 어느정도 배부른 나라 되었다고 기본의 기초같은 농경지를 홀대하는 요즘,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다른건 다 버려도 결코 경작지를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 민족을 먹여살렸고, 우리나라의 힘이 되어주었던 논, 그 논에 매년 봄이 오게 하려면.....

 

 


 

 

 

Isao Sasaki - Sweet Breeze (달콤한 산들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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