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후 이젠 게릴라 폭우까지, 도대체 우기는 언제 끝날까
천상병은 비오는 아침의 신선감(新鮮感)을 노래했는데
짜증이 나는 걸 보면 천상병의 감각이 부러워진다
이불마다 눅눅하고, 빨래는 안 마르고
구름과 습기에 지쳐갈 무렵
아직도 하늘엔 시커먼
구름이 꽉 차있는데
가방 속에서 무료해졌을
카메라를 챙겨 들고 무작정 나섰다
나오고 보니 모자도 안쓰고 나왔다
"오늘 얼굴 좀 타겠구만..."
부석을 지나 안면도로 들어가기 전
우선 마검포에 들렀다
세찬 바람, 누렇게 뒤집혀진 바닷물
그래도 몇몇 해수욕객들은 있었다
그리고 어딜 가나 만날 수 있는 낚시꾼들
안면도로 들어서기 전 칼국수로 점심을 때웠다
오늘은 안면도를 영목항까지 샅샅이 훑으리라
영목항까지 가는 간선도로에서 갈라지는 길들은 모두 들어가 보았다
그리하여 들린 데가 대야도 습지
그런데 대야도에 들어서다 보니 왠 표지판이 하나 서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천상병 시인 옛 집
그래서 대야도를 "시인의 섬"이라고 부르는 듯 했다
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량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귀천(歸天)
천상병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비 오는 날
천상병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1백50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 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新鮮感)을
나는 어찌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요.
음 악
천상병
이것은 무슨 음악이지요?
새벽녘 머리맡에 와서
속삭이는 그윽한 소리.
눈물 뿌리며
옛날에 듣던 이 곡의 작곡가는
평생
한 여자를 사랑하다 갔지요?
아마 그 여자의 이름은 클라라일 겝니다.
그의 스승의 아내였지요?
백년 이백년 세월은 흘러도
그의 사랑은 아직 다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새벽녘
멀고 먼 나라
엉망진창인 이 파락호의
가슴에까지 와서 울고 있지요?
無 名
천상병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저녁놀이 져가는 것이었다.
그 시간과 밤을 보면서
나는 그때
내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봄도 가고
어제도 오늘 이 순간에도
빨가니 타서 아, 스러지는 놀빛
저기 저 하늘을 깍아서
하루 빨리 내가
나의 無名을 적어야 할 까닭을
나는 알려고 한다.
나는 알려고 한다.
바다로 가는 길
천상병
한줄기 지평(地平)의 거리는,
산에서 또 다른 산을 향한,
하늘의 푸른 손이었습니다.
불가항(不可抗)의 그 손에 잡힌 산산(山山)의 호수에
언제 새로운 소식(消息)이 있어,
들판 위에는 무수한 길이
실로, 무수한 길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내일 나는 바다로 가자.
들국화
천상병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강 물
천상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달
천상병
달을 쳐다 보며 은은한 마음.
밤 열시경인데 뜰에 나와
만사(萬事)를 잊고 달빛에 젖다.
우주의 신비가 보일 듯 말 듯
저 달에 인류(人類)의 족적(足跡)이 있고
우리와 그만큼 가까와진 곳.
어릴 때는 멀고 먼 것
요새는 만월(滿月)이며 더 아름다운 것
구름이 스치듯 걸려있네.
나 무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새
천상병
가지에서 가지로
나무에서 나무로
저 하늘에서
이 하늘로,
아니 저승에서 이승으로
새들은 즐거이 날아 오른다.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대자대비(大慈大悲)처럼
가지 끝에서
하늘 끝에서....
저것 보아라.
오늘따라
이승에서 저승으로
한 마리 새가 날아 간다.
오월의 신록
천상병
1월의 신록은 너무 신선하다.
녹색은 눈에도 좋고
상쾌하다.
젊은 날이 새롭다
육십 두살된 나는
그래도 신록이 좋다.
가슴에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늙었지만
신록은 청춘이다.
청춘의 특권을 마음껏 발휘하라.
약 속
천상병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로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톳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인터넷에서 얻어온 글]
< Love Is - Andan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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