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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밖에서/들꽃과 寫眞

[백두산 여행] 集安 장군총

by 緣海 2008. 9. 17.

 

1.

백두산 여행중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인 국내성(현 集安)에서 장군총을 만났다.

 

고구려 두번째 수도이었던 길림 집안 (中國 吉林省 集安)에 있는,

일명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이 황제묘는

집안 지역에서 가장 특출하게 돋보이는 반듯한 피라미드로 인하여 만주 전역을

휘어잡은 고구려 (高句麗)의 광개토대제의 무덤 (廣開土王陵)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이 무덤은 광개토대제의 비석으로부터 1Km나 떨어져 있다.

 

 

2.

集安시에서 동북쪽의 禹山밑에 있다 해서 禹山下고분군으로 이름지어진 고분군 내에 위치하고 있다.

 

광개토대제의 비석에서 불과 5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적석총에서

 '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 ( 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 )'라는 의미의

명문 (銘文) 벽돌이 출토되고,  무덤의 크기도 이 장군총에 비하여 4배나 되어

오히려 난잡하고 볼상 사나운 적석총을 광개토대왕의 무덤 (太王陵)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장군총은 고구려 장수왕의 무덤이라  추정하는 학자도 있지만 아직 분명한 것은 아니다.

 

 

3.

이 우산하고분군을 집안시에서는 禹山貴族墓地라 이름붙여 놓았다.

 

고구려는 졸본(환인 )의 오녀산성에서 나라를 세운 뒤 (BC 37),

유리왕 22년 (AD 3)에 집안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장수왕 15년 (AD 427)까지 이 집안을 400여년간 고구려의 수도로 삼았다.

이 장군총은 대략 5세기 이전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은 국내성 (集安)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며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르킨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도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 천지 (白頭山 天池)를 향하고 있다한다.

즉 고구려의 근본이 백두산 천지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추정으로서 어느정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4.

그러나 아직도 중국측에서 세운 비석은 장군총이라 적고 있다.

 

"장군총은 잘 다듬은 화강석재로 7단의 방단 (方壇)을 계단형으로 쌓았고

분구의 정상은 절두방추형을 이루었으며 제1방단은 4단이지만 제2방단에서

 부터 윗부분은 3단으로 되어있다.

 높이는 12.4미터, 제1방단의 한 변은 약 31.58미터, 제일 위의 제7방단의 한 변은 약 15미터이고

각 변은 각각 방위선상 (方位線上)에 놓여있으며

 제1방단의 각 변에는 각기 3개의

긴 자연석 (가장 큰 것의 너비는 약 2.7미터, 길이는 4.5미터 )이 기대어 세워져 있다.

그 내부 주체인 횡혈식 석실은 제3방단의 윗면이

 현실 바닥이고 제5방단의 서남면에 연도가 달려있으며

평면은 정방형, 한 변의 길이는 약 5.5미터, 높이 또한 약 5.5미터이다.

현실의 네 벽은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6단으로 쌓아올리고

 네 벽의 윗부분에는 벽면과 평행으로 1단의 방주형 (方柱形) 평행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커다란 판석 한 장을 덮어 구축한 평천장이다.

 

 

5.

장군총 앞에서 어설픈 자세로 인증샷도 날려 보고...

 

그리고 벽면, 천장에는 석회를 바르고 현실 입구에는 2장의 돌문이 있었으나 파괴되었다.

연도의 길이는 약 5.45미터, 너비 2.6미터, 높이 약 2.6미터이다. "
(인용 ; 김기웅, '고분', 빛깔있는 책들, 대원사, 1995)

 "만주 지방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선대의 돌무덤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돌무지 무덤인데, 돌각담 무덤이라고도 하고 적석총이라고도 하는 바 고구려 전기 수도였던

만주 집안 지방에는 무려 1만 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이 있다. 기원전 3,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 5단, 7단식으로 층 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밋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과 태왕릉이다.

 

 

6.

장군총 주변구역은 잘 정비되어 있고, 샐비어꽃이 눈을 부시게 해주었다.

 

과거 일제시대에 장군총의 맨 위층인 제7층의 사방 변두리에서는

 난간 구멍이 발견되었고 피라밋의 위와 주변에서

 많은 양의 기와와 벽돌이 발견된 바 있다. 장군총의 맨 위 정상부 동남쪽에서

 여러 장의 판석을 확인하였는데, 아마 주춧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피라밋 위에 원래는 어떤 건축물을 일종의 능묘 위에

세우는 사당 (陵上廟)과 같은 성격의 이른바 향당 (享堂)이라고 한다.

역시 제사를 지내는 종교적인 시설로서

 옛날에 동이민족이 세운 나라에서 유행하던 묘제의 하나이다.

 

 

7.

장군총 정면사진

 

더욱 놀라운 것은 청나라 때 (건륭 31년)의

 '곡부현지 (曲阜縣志)'에 동이민족의 시조라고 하는

소호 김천씨 (少昊 金川氏)의 피라밋 능묘 위에 향당 건축과 같은 건축물이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보면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소호 김천씨의 후손이라 일컬었다.

 ( 羅人自謂金川氏之後 故姓金 ...首露與新羅同性也 )"고 했다.

" (인용 ; 이형구, 한국 고대문화의 기원, 도서출판 까치, 1991)

 

 

8.

장군총 위에는 무심한 구름만이 오락가락...

 

집안 주변에 널려져 있는 수많은 고분들 가운데 이 장군총이 유별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적석총을 둘러싼 12개의 자연석 (호석 ; 護石)과 주변에 배총 (陪塚)이라 하여

이집트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이 장군총을 지켜주는 수호자가 있다는 점이다.

호석은 십이지신상의 기원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배총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분명한 학설이 제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왼쪽 사진에서 보이는 고인돌과 같은 것이 바로 배총이다.

현재는 하나만 남아있으며, 과거에는 이 장군총의 네군데 모서리 방향에 배총이 있었다고 한다.
(1997년 1월 작성)

우리가 들었던 첩의 묘라고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9.

동서남북 사면의 호석(護石)

 

우리에게 장군총이라 알려진 이 무덤이 사실은 이곳 사람들에게 "황제무덤"이라고 불려졌다는 것이다.

즉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 황제무덤을 배경으로 하여…”

“원래는 집안이란 집자가 ‘輯’이고 6.25 동란 후 지금의 ‘集’자로 고치고 황제무덤을 장군묘로 고쳐 썼습니다”고 하여

현지 조선족들은 “장군묘는 황제무덤”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황제무덤을 장군묘로 바꾼 것이 6.25 이후의 일은 아니지만 집안의 고구려 무덤을 ‘황제무덤’이라고 했던 것은 사실이다.

18세기 전반에 제작한 해동지도에는 국내성을 오국성이라고 표기했고

그 옆에 분명히 황제무덤(皇帝墓)이라고 표시하였다.

최근 중국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장군총은 장수왕릉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분명히 장군의 무덤은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빛을 낸 왕의 무덤을 황제무덤이라고 부르지 않더라도

그 위상을 깎아내려 ‘장군의 무덤’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10.

장군총 계단을 따라 오르내리는 수많은 사람들, 계단은 관광을 위하여 설치되었다.

 

중국의 집안 즉 국내성이라고 이름한 고구려의 옛도읍지에 가면 동방의 피라밋이라고 불리는《장군총將軍塚》이 있다.

청나라 말기에 청나라의 봉금정책을 무시하고 생계를 위해 지금의 집안 일대로 들어온 중국인들과

한반도를 넘어 중국에 들어온 조선인들이 무덤이 웅위로움을 보고 어떤 변관을 진수하던 장군의 무덤인 줄 알고

《장군총》 혹은 《장군분將軍墳》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1.

얼마나 큰 규모인지는 올라간 사람들과의 크기를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북으로는 룡산을 등에 업고 서로는 대우산과 이웃하고 동남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앞에는 드넓은 개활지에 호태왕비(광개토왕비)와 호태왕릉을 마주하고 있으며

멀리 고구려의 도성인 국내성(집안시)를 바라보고 있는 장군총, 좋은 지세를 탔을 뿐이 아니라 기세 또한 웅장하다.

사서들은 고구려가 28대에 걸쳐 705년간이나 그 사직을 이어왔다고 한다.

28대에 705, 중원땅의 한 왕조의 2~300년 역사에 비하면 너무나도 긴 역사시기이다.

하기에 고구려의 역사는 중원의 서한왕조부터 당나라에 이른다.

따라서 아직은 고구려시기 고서들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구려의 역사는 물론

700여년 간 수많은 교체를 겪었던 중원 왕조들의 사서기록에 널려있는 편단을들 주어 모아 연구하고 있는 상황이며

앞으로 소개하게 될 호태왕비의 기록을 중요한 근거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12.

장군총을 오르다 옆을 바라보니 높은 산이 보인다. 우산이다.

그 시절 같았으면 무덤을 오르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불경죄였으리라..

 

전문가들은 고구려 왕조의 18대에 걸친 임금들의 18기의 무덤이 집안 주위에 있는 퉁고우(洞溝)무덤군에 널려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장군총은 가장 잘 보존된 무덤이라고 한다.

장군총은 정밀하게 깎은 화강암으로 축조했는데 무덤은 거의 정방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31.58m, 지상에 모두 7층의 계단이 있어 22층의 돌로 쌓고

안에는 흙과 자갈을 이겨 다져 넣은 구조로 되어 있으며 무덤의 높이는 12.4m, 모두 1100여개의 돌로 축조되어 있다고 한다.

묘실은 3번째 계단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묘실의 문은 5번째 계단에 나 있으며

230도의 서남방향을 향해 있다. 묘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기 5m, 높이가 5.5m,

묘실의 바닥에는 크기가 같지 않은 두개의 돌침대가 놓여 있으며

묘실의 천정은 통 돌로 덮였는데 무게가 약 50t가량 된다고 한다.

묘실 정상의 한 변의 길이는 13.2m~13.7m로 변 마다 20여개의 구멍이 뚫려 있으며

전에는 난간혹은 묘실 위에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석을 쌓고 안에 자갈을 다져 넣어 축조했음으로 자체 중량의 장력(張力)으로 벽이 겉으로 밀고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한 면에 10여 톤씩 되는 바위 3개씩 받쳐놓았는데 지금 하나는 없어지고 11개가 있다.

장군총을 축조한 거석들과 벽을 받쳐놓은 거석은 모두 22km밖의 채석장에서 운반해온 것인데,

1500여년 전, 운반도구와 기중기술이 낙후한 고구려 시대에 이처럼 방대한 공정을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인들의 비상한 지혜와 건축, 운반기술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릉묘로 알려진 장군총 남쪽 60m되는 곳에서 배수구를 발견한 것으로 보아

장군총 주위에는 너른 릉원과 묘역(墓域)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장군총의 동북쪽에는 동남에서 서북으로 자리 잡은 무덤군이 있었고,

서남 200m되는 곳에는 제사유적지가 있는데 면적은 5ha나 된다.

실로 거대하고 웅장하다. 그 밖에 어떻게 다른 표현을 할 수 가 없다.

 

 

 

13.

이번엔 반대편을 보니 집안 시내가 곧바로 보인다. 죽어서도 도성인 국내성을 바로 볼 수 있는 곳에 묻혔다.

 

고구려인들의 경천(敬天)사상

왕도의 기운이 서서히 어리는 국내성, 그 동북쪽에 거연히 솟아있는 장군총,

2천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지각운동도 많이 겪었겠지만 여전히 숭엄한 모습을 변하지 않고 있는 장군총,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고구려인들의 지혜와 7백여년을 이어온 사직의 역사뿐이 아니다.

장군총은 그것보다는 고구려인들의 하늘을 우러르고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경천(경천)의 사상과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인본주의 사상이기도 하다.

 

 

 

 

14.

한 칸을 돌아가니 이번엔 북한쪽 산들이 압록강 너머로 보인다.

 

장군총은 방형계단식식실묘(方形階段式石室墓)이다.

산의 정상봉이 아닌 서서히 솟아오르기 시작한 산마루에 우뚝 솟아 있으나

하늘을 찌르는 그런 뾰족한 끝이 없이 무덤 위는 평평한 대()로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이집트의 추형(錐形)의 피라밋과는 다른 고구려 사람들의 경천사상에서 오는 겸허함이다.

뾰족함이 말하는 바는 탐구와 진취와 함께 방어와 공격이 그 주요 기능이다.

내부 심령 깊이에서 오는 팽창에 따른 확장과 점유와 탐욕에서 오는 공격과 방어를 위한 데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밋이 바로 그런 방어와 공격의 대표성적인 축조물이다.

이집트 피라밋에 어린 신화와 전설이 이런 것들을 잘 말해주고 있으며

《바로의 저주》와 같은 것들이 모두 이를 실증하고 있다.

알렉산더의 확장과 무덤에 진입한 자에 대한 바로의 저주 역시 이를 잘 말해주고 있는 바이다.

 

 

 

15.

장군총 정면에서 집안 시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고구려의 장군총은 그것이 아니다.

장군총은 7층의 계단으로 되어 있고 무덤 맨 위는 평평한 대()이다.

평면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로 평안함이요 평화요 겸허함이다.

뾰족함이 말해주는 것이 공격과 방어와 진취라면 평면이 말해주는 것은 평안과 접수와 겸허함이요,

자기의 실력에 바탕을 둔 듬직함이다.

하늘의 기를 받고 하늘의 뜻과 하늘의 순리를 따라서 행하는 것,

그리고 하늘의 아들(天之子)로서 죽은 다음에도 하늘의 뜻을 따르는 그런 경천애민(敬天愛民)과 겸허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고구려와 고구려의 시조 주몽왕이 북부여 탈출 전설,

그리고 주몽왕의 탄생설화들은 모두 고구려 왕족의 도통을 하늘의 아들로 말하고 있다.

 

 

16.

 한 칸을 돌아가니 이번엔 북한쪽 산들이 압록강 너머로 보인다.

 

주몽 탄생설화에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는 하백(河伯, 강의 신)의 딸이다.

유화와 훤화(萱花), 노화(蘆花)  세 자매가 압녹수(鴨綠水. 일설에는 지금의 송화강이라고 한다.

어쩌면 송화강으로 봄이 그럴 듯 하다. 사서의 기록과 고고학의 연구에 따르면

지금 길림성 중부의 길림시(吉林市)에 바로 부여국의 도읍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압녹수를 송화강으로 봄직하다.)가에서 노는 데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가 인간세상을 두루 운유하다가

이들 세 자매 가운데서 유화가 가장 예쁜 것을 보고 유화와 사랑을 맺게 되고,

유화가 임신한 다음에 해모수는 하늘나라로 떠나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자기의 허락도 없이 다른 남자와 사랑을 맺고 임신을 한데 대로한 하백,

거기다 이제 하늘로 돌아간 해모수가 다시 오지 않자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게 된 유화,

이에 대로한 하백은 유화를 압록수에 유배를 보내버린다.

 

 

17.

천년의 사연이 그대로 간직돼 있을까. 황제의 무덤위로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압록수에서 고기를 잡아 먹으며 살아가던 유화는 어렵을 나온 부여왕을 만나게 되고, 결국 부여국에서 아들 주몽을 낳게 된다.

이렇게 서자(庶子)로 태어난 주몽이 왕자 대소(帶素) 등의 모살(謀殺)을 피해 도주하다가 강이 가로막았을 때도

주몽은 물에 채찍질을 하면서 자기가 천제의 후손인데 물속의 짐생들은 다리를 놓으라고 호령하자

거북과 자라들이 떠오르며 다리를 놓는다.

이처럼 고구려는 그 왕통(王統)을 하늘에 잇고 있다. 그만큼 그들은 하늘에 대해 겸허하고 하늘의 의사를 따르고

하늘로부터 그 뜻을 우러러 받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하늘에 대해 경천의 마음만 가질 뿐 공격의 자세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하기에 고구려의 옛 무덤들은 하나 같이 끝이 하늘을 향해 뾰족한 것이 없다.

모두다 정상 부위는 4면 추형의 뾰족한 부분을 자른 제형 모양으로 믿믿한 평면을 이루고 있다.

장군무덤이 그럴 뿐이 아니라 퉁고우(洞溝)무덤군에 있는 고구려 귀족무덤군이나 호태왕릉 모두가 다 그렇다.

이런 무덤이나 축조물이 사람들에게 주는 첫번째 인상은 바로 평안함과 안전함, 그리고 듬직함과 묵중함이다.

 

 

18.

배석묘쪽으로 가는 길

 

장군총은 과연 누구의 무덤이었던가?

학자들은 장군총을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장수왕 14년에 평양성으로 천도(遷都)를 했는데 장수왕 무덤일 수가 있느냐고 질의를 하고 있지만

장군총을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는게 사실이다

 

 

19.

장군총의 배석묘

 

고구려 수도이었던 연변 집안(中國 吉林省 集安)에 있는, 일명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이 장군총은

집안 지역에서 가장 특출하게 돋보이는 반듯한 피라미드로 인하여 만주 전역을 휘어잡은

고구려(高句麗)의광개토대왕의 무덤(廣開土王陵)으로 여겨졌었다.

그러나 이 무덤이 광개토대왕의 비석으로부터 1Km나 떨어져 있고,

광개토대왕의 비석에서 불과 5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적석총에서

'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라는 의미의 명문(銘文) 벽돌이 출토되고,

무덤의 크기도 이 장군총에 비하여 4배나 되어 오히려 난잡하고 보기 흉한 적석총을

광개토대왕의 무덤(太王陵)으로 여기기도 하였지만 이 장군총은 고구려 장수왕의 무덤이 분명하다.

 

 

20.

장군총의 배석묘

 

고구려는 졸본(환인)의 오녀산성에서 나라를 세운 뒤 (BC 37), 유리왕 22년 (AD 3)에 집안 (국내성)으로 천도하여 장수왕 15년

(AD 427)까지 이 집안을 400여 년간 고구려의 수도로 삼았다. 장군총은 대략 5세기 이전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면은 국내성(集安)을 바라보는 서남향이며 네 귀가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석실 안

석관의 머리 방향이 53°로 북동쪽에 있는 백두산 천지(白頭山 天池)를 향하고 있다고 한다.

즉 고구려의 근본이 백두산 천지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추정으로서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21.

 

“장군총은 잘 다듬은 화강석재로 7단의 방단 (方壇)을 계단형으로 쌓았고, 분구의 정상은 절두방추형을

이루었으며 제1방단은 4단이지만 제2방단에서 부터 윗부분은 3단으로 되어있다.

높이는 12.4미터, 제1방단의 한 변은 약 31.58미터, 제일 위의 제7방단의 한 변은 약 15미터이고

각 변은 각각 방위선상 (方位線上)에 놓여있으며 제1방단의 각 변에는 각기 3개의 긴 자연석

(가장 큰 것의 너비는 약 2.7미터, 길이는 4.5미터)이 기대어 세워져 있다.

그 내부 주체인 횡혈식 석실은 제3방단의 윗면이 현실 바닥이고 제5방단의 서남면에 연도가

달려있으며 평면은 정방형, 한 변의 길이는 약 5.5미터, 높이 또한 약 5.5미터이다.

 

 

22.

 

현실의 네 벽은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6단으로 쌓아올리고 네 벽의 윗부분에는 벽면과 평행으로 1단의 방주형 (方柱形)

평행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커다란 판석 한 장을 덮어 구축한 평천장을 놓았다.

그리고 벽면, 천장에는 석회를 바르고 현실 입구에는 2장의 돌문이 있었으나 파괴되었다.

연도의 길이는 약 5.45미터, 너비 2.6미터, 높이 약 2.6미터이다.”

“만주 지방에서 일어난 고구려가 선대의 돌무덤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 돌무지무덤인데,

돌각담 무덤이라고도 하고 적석총이라고도 하는 데 고구려 전기 수도였던 만주 집안 지방에는 무려 1만 기 이상의

고구려 고분이 있다. 기원전 3,4세기 고구려 중기에 오면 돌무지무덤에 3단, 5단, 7단식으로 층수가 증가하면서

마치 계단식 피라밋형의 돌무덤으로 축조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장군총과 태왕릉이다.

 

 

23.

 장군총 앞에서 자두와 살구를 팔고 있는 사람, 자두 맛이 참 맛있었다.

 

집안 주변에 널려져 있는 수많은 고분들 가운데 이 장군총이 유별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적석총을 둘러싼 12개의 자연석

(호석 護石)과 주변에 배총(陪塚)이라 하여 이집트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이 장군총을 지켜

주는 수호자가 있다는 점이다. 호석은 십이지신상의 기원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배총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분명한 학설이 제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고인돌과 같은 것이

바로 배총이다. 현재는 하나만 남아있으며, 과거에는 이 장군총의 네 군데 모서리 방향에

배총이 있었다고 한다.

 

 

 

24.

 

 자두와 살구를 파는 사람들 틈에 섞여 한 무데기 사서 먹었다.

 그 옛날 고구려적에도 자두나무는 그곳에 있었을까.

 

 

25.

 여행기간내내 우리를 태우고 다녔던 관광버스.

 


♣ 잉카음악 Cusco & Sisay ♬


♣ Jatarishum Guambritos ... Sisay
♣ 불붙는 잉카 ... Cusco
♣ 코시코스의 우편마차 ... Cusco
♣ Alcatraz ... Cusco
♣ Inca Dance ... Cusco

♣ Tupak Amaru ... Cusco
♣ Penguin Dance ... Cusco
♣ Susurros ... Sisay
♣ Malacunhuahuapac ... Sisay
♣ Quien Te Ha Dicho ... Sisay

♣ Naira Sajuna ... Sisay
♣ Kushi Sanjanito ... Sisay
♣ Atahualpa Yupanqui ... Sisay
♣ Andes ... Cusco
♣ Montezuma ... Cusco

♣ Eldorodo ... Cusco
♣ 대황하 ... Cusco
♣ Inka Bridges ... Cusco
♣ White Buffalo ... Cu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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