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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밖에서/들꽃과 散文

작은 것들, 그러나 소중한 것들

by 緣海 2007. 7. 18.

1. 하늘       

하늘도 깊어지면 저토록 투명해질까.

아침에 두터웠던 구름들이 하나씩 흩어지더니

오후무렵에는 그동안 장맛비에 씻겨진 하늘이 깊어질대로 깊어져

손톱으로 팅기면 티잉~ 소리가 날듯 맑고 단단해졌습니다.

하늘은 깊어질수록 높아지고, 바다는 깊어질수록 낮아집니다.

이제 텅 빈 하늘은 높아질대로 높아져

무섭도록 검푸르게 투명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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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주      

그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동네 골목 어귀에 전신주 하나가 서 있습니다.

그냥 전신주가 아니라 목주(木柱)입니다. 즉 나무로 만든 전신주이죠.

새마을운동 덕에 초가지붕이 모두 슬레이트 지붕으로 변하였듯,

모든 목주들은 콘크리트 전주, 즉 CP주로 교체되었죠.

연탄 보일러의 보급은 산에 낙엽들을 제자리에 있게 해주었고,

슬레이트 지붕은 논에 짚을 지켜 주었듯

콘크리트 전주는 산에서 나무가 베어지지 않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서산 동문동 한 구석에는 우리나라에 마지막 남은 듯한 목주가 하나 서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전력선주는 아니고 통신주인듯 하군요.

따라서 한전 재산이 아닌 KT 재산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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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낙서      

그 목주에서 조금 더 들어오다 보면 석양의 햇살이 비껴지는 담벼락에 낙서가 적혀 있습니다.

그 어느 누구의 장난일까,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미스킴이라 씌여 있습니다.

저 번호로 다이얼을 누르면 정말 어느 미스킴이 대답할까요?

호기심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사연 가득한 로맨스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지금은 퇴근길, 서산으로 온 후, 그동안의 무보직 발령의 설움을 딛고 첫 근무를 시작한 날이 하필 휴일이었네요.

하루종일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한 건물에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길이라 낙서는 그냥 흘려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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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지여인숙ⅰ     

골목길을 좀 더 돌아오다 보면 양지 여인숙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간판 주변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여인숙들은 왜 그렇게도 골목 안쪽에만 숨어있는 것인지, 어릴적에는 여인들만 자는 곳인줄 알았었습니다. 

그 여인이 女人이 아니라 旅人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혼자만 품어왔던 은밀한 상상이 산산조각 나버렸지만,

아까의 미스킴 전화번호 낙서처럼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해 주었던 장소임에는 틀림 없었습니다.

그 낙서도 이곳 양지여인숙에서 자극을 받아 장난삼아 휘갈겨 놓은 낙서일 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도 왜 旅人宿이 골목길 안쪽에만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른 숙소들은 간판도 다들 커다랗던데,

여인숙 간판은 늘 저 모양으로 조그맣고 싸구려스럽게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인숙이라면 어딘지 모르게 싸구려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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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양지여인숙ⅱ        

양지여인숙 문 안쪽을 들여다 봅니다. 농필길 42번지에 있는 여인숙은 파란색 대문과 붉은색 기둥이 잘 어울려 보입니다.

대문 안쪽에는 바깥에서 안쪽을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가리개가 놓여져 있습니다.

담벼락은 기둥마다 파란색 페인트를 칠해 놓았는데, 저런 모습만 보면 예전에 아버님께서 담 치장을 하실 때 생각이 납니다.

아버님께서도 담을 잘 세우셨습니다. 블록을 쌓고 맨 위엔 얼기설기 깨진 유리병 조각을 험상궂게 꽂아놓고

벽체엔 몰탈을 바르고 쇠손으로 몰탈을 뿌려 오톨도톨한 효과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겉은 멋있었어도 아버님께서 세운 담은 항상 기초가 약해서 얼마 안가 쩍쩍 금이 가곤 했었죠.

그래서 나는 어릴적부터 기초의 중요성을 체감했습니다. 지금도 시골 집에 가면 30년전에 내가 기초한 위에 쌓은 담은

금하나 가지 않고 지금껏 멀쩡히 서있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아무튼 담벼락 밖에는 능소화가 뚝뚝 지고 있는데, 담벼락 안쪽에는 오늘밤 또 어떤 꽃이 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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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능소화     

아이들이 만지면 눈이 먼다 하여 어느 아파트에서는 몽땅 뽑아내 버리기도 한다는 능소화.

슬프디 슬픈 전설이 어려있는 능소화 꽃말, 구중궁궐 소화 궁녀의 한이 묻어있는 담벼락의 능소화.

능소화는 오늘도 담에 피어 임금님의 발길을 기다리겠다는 생전의 약속을 지키다 저리 낙화로 져버린 것인지.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보려고 높게 높게 줄기를 담에 뻗어 올라만가고,

조그만 발자국 소리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꽃잎을 쫑긋 넓게 벌린 모양의 꽃이 되었습니다.

능소화는 기다림에 지쳤는지 애틋한 한을 간직한 채 낙화로 져버렸지만,

낙화가 되어서도 임금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겠다는 것인지, 떨어져 몇날 며칠이 되도록 생생합니다.

양지여인숙 담장위에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밖에서는 능소화 꽃이 지고 있지만, 안에서는 어느 청춘의 꽃이 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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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골목길     

양지여인숙을 지나면 구불구불 골목길이 이어집니다.

겨울이면 휭~ 하니 찬바람만 불어오는 곳, 한여름인 지금은 사방이 가로막혀 바람조차 통행하지 못하는 곳.

차가 없고 대로가 없던 옛날에는 골목길이 그야말로 한길이었습니다.

저러한 골목 가득 사람들이 어깨를 마주치며 지나다녔고, 가까워진 거리만큼 의례이 인사 한마디씩은 건네가며 지나다녔죠.

문득 어느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골목길 지나칠 때엔, 내가슴은 뛰고 있었죠,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방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죠."

지금도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들은 많은데 불빛은 꺼져있고, 골목길은 한나절이 되어도 사람통행 별로 없이 한산한 모습입니다.

그런만큼 더욱 쓸쓸해진 골목길, 저 골목길을 돌아서 저는 걸어서 출퇴근 합니다. 저쪽에 제가 사는 아파트 기산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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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탑동길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지명에 탑字가 들어있으면 그 인근에는 반드시 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뒷산인 부춘산으로 운동을 가려고 나선 날,

가다보니 골목길인 탑동길을 가게 되더군요. 그래서 이 인근에도 탑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기웃거리며 가다보니, 바로 위 사진과 같은 당간지주를 보게 되었습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당간지주가 있다는 것은 바로 이곳이 절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다가가서 당간지주 옆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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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당간지주     

당간지주란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당간의 좌우에 세운 돌기둥을 말하는 것으로, 당간이란 그 주변지역이 사찰이라는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기 위하여 세우는 철로 만든 기둥입니다. 지금도 갑사에 가면 철당간과 당간지주를 볼 수 있습니다.

표지판에 설명된 것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당간지주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석조물이다.

당간은 절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위엄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의미를 가진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를 말한다. 지주는 단면 사각형으로 중앙에는 당간을 받치는 부분에 지름 20cm정도의

구멍을 약간 파내어 당간을 고정 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당간 높이 4m, 화강암"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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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대사동(大寺洞)     

이 일대를 대사동이라고 부르는데, 고려말에 큰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동문동이라고 불려지긴 하지만, 원래 지명은 대사동, 그 후에는 탑동,

그리고 그 이후에는 동문동으로 개명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문동이란 서령군 관아의 동쪽 문이 있던 곳이라는 의미이겠지요.

지금은 큰 절도, 동쪽 문도 없어져 버렸지만, 저 당간지주가 아직도 남아서 이름으로만 남은

동리 명칭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절은 없어지고, 문도 사라지고 그 자리엔 큰 주택가가

자리잡게 되었는데, 묘하게도 어느 집 담장의 일부로 저 당간지주가 사용되었기에

여태 없어지지 않고 지금껏 남아 있게 되었나 봅니다.

자세히 보면 블록 담장이 당간지주를 관통하여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 담장이 있던 집은 헐어지고 공터로 남아 있습니다.

동네 한가운데에 집들의 사이에서 묘하게 남아 서있는 저 당간지주를 보고 있노라면

약간의 각도로 일그러져 있는 두 돌들만큼이나 역사의 수수께끼를 가슴으로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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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동문동 5층 석탑     

드디어 탑동길의 도로명을 짓게 해준 석탑을 찾았습니다. 아까의 그 당간지주가 있던 골목에서

한블럭을 더 올라간 골목 안쪽에 저렇듯 준수하게 우뚝 서있습니다.

이 탑 역시 어느 주택의 안마당에 서 있었던 듯 하지만, 그 집은 이미 헐린 듯, 주택가 골목 안의

집 한 채만한 넓이의 공터에 우뚝 서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의 절이었을 공간에 여러채의 집들이 들어서다 보니 당간지주와 석탑이 나뉘어져

서로 각각 다른 골목길에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석불이며 기왓장 등 절의 흔적들이

이것들 말고도 여럿 있으련만, 절대신 집들이 들어서는 과정에 모두 흩어져 없어진 듯 합니다.

이 석탑은 받침돌, 이층 기단의 면석 및 상대갑석의 일부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 되었고,

현재 3층의 지붕돌까지만 남아있으나, 원래는 5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 증거물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으니 다음 사진의 지붕돌들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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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역사의 잔재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석탑의 4층과 5층을 이루었을 지붕돌들이 여기 이렇게 떨어져 나와 나뒹굽니다.
왜 저토록 방치하고 있는 것이며, 복원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요. 저 돌들은 분명 탑에서 떨어져 나와 저곳에 있을테지만,

어느 한 순간 욕심이 저 돌조각을 집어가 버린다면 영영 5층 복원은 힘들게 되지 않을까요?

역사의 회오리 바람속에 만월대도 초토가 되어 버리고, 수많은 유적들이 영원히 사라져 버렸지만 지금 남아있는 것들 만이라도

소중히 보관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지금 고려말 저 석탑을 쪼고 있는 석공들 앞에 마주 선 기분이지만, 그 대화는 곧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노래가락 한 자락에 흥을 돋우며, 수없이 정을 쪼고 수없이 각도를 가늠해 보았을 그 석공,

바로 나의 먼 할아버지였을지도 모르며, 이름 대신 돌 속에서 빠져 나온 석탑의 모양으로 자신의 혼을 새겼을 그 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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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염원의 중첩     

탑보다도 더 높이 옥수수는 자라고, 해탈을 기도했을 애틋한 마음은 탑 위로 적층되어집니다.

탑은 왜 같은 모양을 중첩해서 3층, 5층, 7층 혹은 9층 이상의 다층으로 쌓았을까요.

왜 기단부는 한결같이 이중기단으로 쌓았으며, 1층 기단의 면석은 4매의 돌로 짜여져 있으며,

지붕돌은 1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몸돌에는 기둥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일까요?

어느 종교에서든 마찬가지겠지만, 기도는 반복입니다. 같은 모양과 동작을 수없이 되풀이 하는 것

바로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염원이며, 염원은 이렇듯 자꾸만 중첩되어집니다.

탑은 근본적으로 사리공양의 표본이지만, 염원의 대상이기도 하며, 내세의 현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탑을 향하여 자꾸만 탑돌이를 하고, 같은 모양의 층을 반복하여 염원을 형상화 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을 모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높이와 층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전 탑의 가장 일반적인 층 수가 3층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때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현대의 사람들은 그저 크고 높아야만 기원의 절실함도 크고 높아지는 줄로 아는 듯 합니다.

자꾸만 동양 최대 혹은 세계 최대라는 말로 규모의 크기만을 내세우는 말들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탈은 그 크기가 아니라 염원의 중첩으로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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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소박함과 부드러움     

시청앞에 있는 서산에서 제일 큰 제일교회입니다. 그리고 시청 뒤의 구부러진 소나무입니다.

소박함이 그리워집니다. 원래 반듯하고 시선을 압도하는 규모는 되국의 기질입니다.

드넓은 대륙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사람들 마음을 규모로 기죽여 놓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산도 작고 들도 작고 나라도 작은 우리나라는 규모가 클 필요가 없었습니다.

개심사를 가보면 올망 졸망 상왕산 밑에 자리잡은 아담한 사찰의 기둥들은 한결같이

구부러진 나무들로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소박한 정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번듯한 유리창과 콘크리트 건물보다 뒤에 서있는 구부러진 소나무가 얼마나 더 부드러운

정감을 불러 일으키는지요. 동양 최대라는 커다란 불상 밑에서 압도되어진 마음은

동네 뒷산의 유유자적하는 소나무의 곡선에서 치유를 받습니다.

어마어마한 건물 안에서 질시되고 욕심사나워진 마음들은 앞동산처럼 부드러운 초가집 지붕을 바라보며

비로소 그 생채기를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소나무와 초가집이 그리워집니다.

예전엔 너무 흔해서 귀중한 줄도 몰랐던 그것들을 우리는 모두 어디다 버리고 산을 깎아 번듯하게 길 내고

작은 집들 재개발하여 커다란 아파트 짓는데 평생 모은 재산과 세금을 쏟아 부을까요.

골목길이 그립고, 여인숙이 그립고, 작은 것들이 그리워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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