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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밖에서/들꽃과 寫眞

하늘못, 天池

by 緣海 2008. 7. 31.

 

1.

그리고 뒤돌아 섰다. 거기에 천지가 있었다.

생각하고 그리워했던 그 모습 그대로 거기 천지가 있었다. 

 

 

 2.

천지 수면위에서 구름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1300여 계단을 한 발 한 발 올라 처음 대면한 천지의 맑은 물에선

상서로운 기운처럼 구름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3.

한반도 최고봉인 백두산은 해발 2744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겨울이 길고 여름은 무척 짧아 6월까지도 잔설을 볼 수 있고,

9월이면 첫 눈이 내리기 시작해 6월부터 9월까지만 입산이 허용된다.

방문하기 가장 좋은 계절은 7월과 8월 두달에 불과하다.

 

 

 4.

분단 현실로 인해 비록 중국을 통해 산을 찾을 수 있지만

그래도 민족 제일의 영산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 걸쳐있으며 전체 면적 가운데

1/3이 중국땅, 2/3는 북한 영토에 속한다.

 

 

 5.

신비로운 천지, 백두산을 오르는 이유는 바로 천지를 보기 위한 것.

천지는 순상화산의 함몰에 의해 생긴 칼데라호로 둘레가 자그마치 14km,

평균수심 200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373m에 이른다.

천지 주위로 16개의 삐죽삐죽한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특히 볼만하다.

웅장한 봉우리들은 16 나한처럼 저마다 위용을 잔뜩 갖추고 천지를 호위하고 있다.

왼쪽은 옥주봉, 오른쪽은 청석봉

 

 

 6.

맑은 날이면 탁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지만, 1년 365일가운데 맑은 날이 불과 100일도

채 안되기 때문에 한 번 방문으로 천지의 전경을 모두 감상한다는 건 아주 운좋은 경우에 해당한다.

맑은 날이라 하더라도 순식간에 구름이 몰려오기도 하는 등, 날씨 변화를 예측하기 힘들다.

천지에서는 관광객을 위한 보트가 운행되고 있지만 그 범위가 중국영토로 제한된다.

보트에서 바라보는 천지 주변 풍경이 뛰어나다.

 

 

 7. 

그러나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지는 않는 백두산, 오른쪽으로 장군봉이 구름속에 아련하다.

 

단군을 봉사(奉祀)하는 백두산 남쪽 농사동 천왕당

1285년에 편찬한 <삼국유사> 고조선시대에 인용된 고기(古記)의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백두산이 우리 한민족의 발상지로 나타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득한 옛날, 하느님의 작은아들 환웅(桓雄)이 여러 차례 인간세계에 내려가고자 하자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뜻을 아시고 하계를 두루 살피시더니 태백(太伯) 곧 백두산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으로 여기시어, 곧 아드님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내려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께서는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박달나무 아래에 내리시어 그곳을 신시(神市)라 하시니,

이 분이 곧 환웅천황이시다.’ 이른바 단군신화라고 불리는 이 기사의 무대가 다름 아닌 백두산이다.

 

 

 8.

백두산은 예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숭배되어 한국에서는 단군(檀君)이 탄강(誕降)한 성지로 신성시되어왔다.

그리고 금(金)은 1172년에 영응산(靈應山)이라 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청(淸)은 이곳을 왕조인 애친각라(愛親覺羅)의 발상지라 하여 숭배하였고

1684년에는 장백산신(長白山神)을 제사지내게 하였다.

 

 

9.

잉크빛으로 물든 천지 하늘과 천지 호수

 

삼지연군 농사동으로 가는 도중에 소홍단교(小紅湍橋)가 있으니

이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삼림을 헤치고 올라가면 석경이 절정에 닿은 곳에 수백 평 잔디벌이 수목 속에 둘려 있어

홍단각의 마루 넓은 집이 길을 눌려 놓여 있고 그 뒤로 일좌 소홍단사(小紅湍祠)가 자리하고 있다.

사당 현판에는 '천왕당' 3자의 현판이 뚜렷하고 그 아래 따로 '존경당' 3자의 편액이 걸려있으며

안기둥에는 '백두종기(白頭腫氣)' '홍단성사(小紅湍祠)'의 일대주련이 있고

바깥기둥에는 '만고명산(萬古名山)' '일국조종(一國祖宗)'의 주련이 있으며,

묘우 안에는 일좌 영위가 서벽에 기대었고 앞에는 향로 향안이 있으므로 영위의 뚜껑을 곱게 들고 보니

'대천왕영신지위(大天王靈 之位)' 일곱 자이다.

그 밖에 군수 현두영, 풍헌 한윤범 기타의 중수기(重修記)가 몇이 있고 상(上 :純祖)자 21년 신사(辛巳)……

부령군수 고승익이 특지를 받들어 영사에 치제(致祭)하고 묘우를 일신케 하였다는 기적문(記蹟文)이 있다.

사실(史實)에 의하면 천왕당은 거금 240년 전 숙종대와 10년 갑자(甲子)에 무산부 설치와 동시에

농사동 서남방 40리쯤 되는 대홍단(大紅湍)에 사당을 세워 천왕당이라 칭하여

단군을 봉사(奉祀)하다가 후 철종 9년 무오(1858)에 이 땅에 옮기게 된 것이다.

 

 

 10.

천지 좌측 청석봉은 화산폭발 당시를 엿볼 수 있는 화산지형이다.

 

이후 해마다 황실에서 칙사를 파견 참배하든지 혹은 본지 군수를 대참(代參)케 하다가 나중에 와서 이것조차 폐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방 인사는 1년 1차씩(6월) 제전을 거행한다 하며 민간의 치성을 벗어난 신앙 초점이 되어 있다 한다.

무산으로부터 또는 혜산으로부터 성악(聖嶽)에 올라가는 연도에 다소 천왕당이 있으나

이것은 다 촌인 행객(村人行客)들의 위하는 사설 신사로되 오직 천왕당은 국가에서 관장하던 대영사(大靈祠)로 된 바이다.

그뿐 아니라 태종 원년(1401)에 동림돈(東林墩)에 사우를 세워 해마다 향폐(香幣)로써 두만강갑(岬)을 제하였고

영조 43년 정해(丁亥: 1767) 추7월에 백두산은 아국 조종(我國祖宗)이요 북도(北道)는 '국조발상지지(國朝發祥之地)'라 하여

갑산부 80리 운룡 이북 망덕평에 각을 세워 백두산을 망사(望祀)하였다.

허항령은 무산·갑산의 군계라 이 영척(嶺脊) 복판에도 일좌 사우가 놓였으니

이 사우가 하시 누구의 청건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간소한 목제(木製)로

그 속에는 북벽(北壁)에 다가서 '천왕지위(天王之位)'를 봉안하였다.

 

 

 11.

구름은 일어났다 스러지고, 다시 일어나고... 새로운 구름이 나타나 천지 봉우리를 갑자기 감싸고 있다.

단군조선의 개국의 터전으로 전하는 백두산 천지, 단군조선은 구름처럼 흩어졌지만, 다시 부여, 고구려가 일어섰고,

고구려 또한 구름처럼 사라졌지만, 언젠가는 다시 구름처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벌판이

우리 민족의 주무대가 될 날이 찾아올 것으로 믿는다.

 

그 신탁의 뒤로는 정면 벽상에 신탱을 걸어 모대(帽帶)한 인물에 시녀가 파초선을 들었으나 모대가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고

오직 시녀가 본상을 들었으나 모대가 흐려져서 잘 보이지 않고

오직 시녀가 본상을 지었을 뿐이며 옆으로 '국사대천왕(國師大天王)'의 안이 있으니

홍단영사(紅湍靈祠)에 비하여 그 묘모(廟貌)와 내용이 적지 않게 틀리며

신탁 앞에 향안, 향로가 있어 순례자들의 향 피운 재와 향전(香錢)이 탁상에 깔려 있다.

여러 가지로 보아 이 허향령 천왕당은 민간신앙의 전당으로만 되었던 것을 짐작하겠다.

또 무두봉 동편 신무장, 이곳은 4782척 되는 고지에 있는데 옛날 백두산신을 봉사(奉祀)하던 묘지라 한다.

 

 

 12.

천지 주위로는 말없이 야생화들이 피었다가는 지고, 또 피어나고,,,

 

단군조선과 관련된 지명, 신무성과 천평(天坪)

 

백두산의 주봉 백두봉에서 남동쪽으로 뻗으며 ‘백두대간’이라 불리며 지리산에 이르는 이 산맥에는

대연지봉 ·소연지봉 등의 화산군과 함경도의 북부를 연락하는 교통의 안부(鞍部)인 허항령(虛項嶺) ·마천령(摩天嶺) 등이 있다.

허항령은 백두산 ·대연지봉 ·간백산(間白山) ·소백산(小白山) ·남포태산(南胞胎山) 등을 연결하는 연봉의 안부로

남쪽으로는 압록강 유역, 북쪽으로는 백두산에 직속하는 천평(天坪)의 고지가 전개된다.

백두산의 정상을 이루는 백두봉은 북한에서는 장군봉(將軍峰), 일제강점기에 대정봉(大正峰)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화구벽 중의 최고점으로 높이 2,744m(북한기록 2750m, 중국기록 2749.2m)에 이른다.

백두봉은 화구벽의 동쪽에 위치하고,

이곳의 남동쪽 4km 가량의 비탈면에는 현재 무용지물이 된 백두산정계비(定界碑)터가 있다.

 

 

13. 

백두산 천지를 오르는 통로는 동서남북 네군데가 있는데, 각각 동파, 서파, 남파, 북파라 부른다.

이중 서파, 북파, 남파는 중국쪽에서 접근할 수 있는 반면에 동파는 북한쪽에서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오른 이곳은 서파이다.

 

백두산의 남동쪽 안부를 이루는 허항령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삼지연(三池淵)은

대소 4개의 얕은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남쪽에서 두번째 것이 가장 커서 주위는 2km 가량이고,

이 호수에는 주위 약 100m의 섬이 있다. 삼지연의 남쪽에는 밀림으로 덮인 침봉(枕峰)이 있는데

이름과 같이 목침(木枕) 모양을 하고 있다. 돌물(乭水)은 석을수(石乙水)라고도 부르는데 두만강의 수원을 이룬다.

신무성(神武城)은 백두산의 동쪽 비탈면에 있는 취락지인데, 단군 왕검이 이곳에서 신정(神政)을 하였으므로

붙은 지명이라 한다. 삼지연에서 신무성을 지나 원지(圓池)에 이르는 일대는 높이 1,500m에 반경 30㎞의

광대한 평탄면(平坦面)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천리천평(千里千坪)이라 일컬어 왔는데,

이곳이 대표적인 용암대지의 지역이다. 1861년에 발간된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에 ‘천평’이란 땅이름이

삼지연 동북쪽 표기되어 있으며 동북쪽으로 두만강을 넘어 중국 숭선(崇善)동쪽에 ‘하천평’(下天坪)이란 지명이

중국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또한 중국 연길시의 옛지명이 ‘국자가’(國子街)로

이곳이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웠던 신시(神市)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14.

다시 구름이 몰려오고, 대낮인데도 칠흑처럼 캄캄한 광경을 보이고 있다.

 

1926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백두산 근참기' 중에서

옥수밀림이 천리에 이른다는 천평에 관한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북새기략>(北塞記略) 저자의 말대로 두만강 토문강의 북과, 압록강 파저강의 서쪽,

혼동강의 좌우 양쪽을 모두 천평이라 할진대, 그 가로세로 넓이가 실로 불가량(不可量)할 것이다.

천평을 백두산 기슭의 총명칭이라 하면 간도(間島)도 물론 그 일부가 아닐 수 없거니와

그 남반(南半)인 조선부분만 하여도 엄청나게 넓은 지역을 포괄하여 사람의 흉금을 시원케 함이 있다.

오랜 전승에 따르면 조선 인문의 창건자는 실로 이 백두으로서 그 최초의 무대로 삼아

이른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희막(戱幕)을 열고 그 극장을 이름하되 신시(神市)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단군의 탄강지요 조선국의 출발점이라 한다.

조선 최초의 입국지(立國地)를 천평이라 추측하기는 십수년 전에 우리 옛 글을 모아 발표한 바가 그 시초인데

그때의 이유로는 조선의 전승에 따르면 나라의 뿌리인 환국(桓國)도 천국을 의미하고,

수군(首君)인 환웅(桓雄)도 천국을 의미하는 등 약간 남아있는 명구가 모두 천(天)으로 일관하였다는 점이다’

 

 

15.

또 다시 밝아지고 있는 천지 북벽, 이 봉우리가 청석봉이라 한다.

뒤쪽으로 꼬불꼬불한 능선 뒤로 송화강으로 흘러내리는 장백폭포(우리말로 비룡폭포)가 있는

달문이 보이고, 이곳을 북파라 한다.

청석봉 뒤로는 중국에서 장백산이라 부르는 백운봉이 있다.

구름이 일어났다 스러졌다 하는 모습은 우리네 민족과 역사의 부침(浮沈)을 보는 듯하다.

 

이곳 천평은 현무암과 부석층으로 덮여 있어 지표수는 없으나

때때로 비로 인하여 음료수를 얻을 수 있어서 사냥꾼이나 산삼을 캐는 사람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단군고조선시대는 청동기문화의 등장시기와 관련이 있는데

아직까지는 백두산 일대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견, 보고 된 바는 없다.

단지 길림시 서단산(西團山)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인 ‘비파형동검’을 비롯,

돌널무덤, 서단산토기(미송리형토기) 등이 발굴된바있으며

북한의 길주 지역에서 고조선시대와 관련된 유적인 고인돌이 발견된바 있을 뿐이다.

서단산 문화론(文化論)은 1930년대 길림지구의 문화유적이 조사되면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조사됐으며

1940년대부터 중국인 학자들이 야외조사를 실시, 1949년에는 신중국 성립을 전후해

중국 최고의 고고학자 배문중(裵文中)등이 중심이 되어 시작됐다.

1946년 동북고고발굴단은 '길림서단산 석관묘 발굴보고서'에서 그 이름을 '서단산문화'라고 제시했다.

 

 

16.

길림지구는 송화강 중·상류 지역에 위치해 동으로 교하현, 남으로 만석현, 북으로 서단현 등이 있으며,

북부와 중부에는 많은 낮은 구릉과 충적평야가 있으며, 나무가 울창하고 장백산의 주산맥과 연결되어 있다.

서단산 유적은 전기(중국의 서주초-춘추초)→중기(중국의 춘추 중기-전국 중기)→후기(전국후기-진, 한)으로 연속되어

절대연대가 전기, 기원전 1105년→중기 기원전 390년→후기(기원전 155년)까지 수치가 제시되고 있다.

서단산 문화의 주된 문화내용은 석관묘(石棺墓)인데,

이는 다음 장에서 소개할 고인돌(支石墓, dolmen)과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예를 들면 상기한 요녕(遼寧)성 남상근 유적의 석관묘에서 출토된 청동검(기원전 9세기)은

한국 부여 송국리 유적 출토 청동검(기원전 7세기)과 완전히 일치한다.

청동기시대 초기에 해당되는 서단산 문화 관계를 고려해 볼 수 있는 신석기 시대 유적도 상당히 많이 확인되고 있다.

예로 도기하 하류에서만 24곳이 확인되고 시기는 지금부터 6500~7000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길림 장령현 요정(長嶺縣 腰井)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석제 유물,

골기(뼈제 도구), 조개껍질제 도구 등의 출토 예는

한반도 신석기 시대에 해당되는 강원도 양양 오산리 유적과 비교할 만하다.

위 서단산문화는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는 송화강유역권으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발흥하였던 지역으로

보다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17.

고구려의 개국조 주몽의 탄생설화 (금방 설화의 기운이 일어나 개벽이 일 것만 같은 분위기의 천지)

 

옛적에 천제께서 그 아들을 부여 고도에 내려 보내어 임금이 되게하니 이가 곧 해모수라.

그가 하늘로서 내려올 제 오룡거(五龍車)를 탔으며 시종자 1백여인이 다 백학(白鶴)과 채운(彩雲)을 타고 위에 떴는데

풍류 소리가 구름 가운데를 움직이는지라.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다가 10여 일을 지나 내려왔는데

두상(頭上)에는 조우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매었으며 아침이면 정사를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를 천왕랑(天王郞)이라 하였다.

북부여 서북편에 청하(淸河) 하백(河伯)이 있고

하백의 따님에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 셋이 있으니 모두 얼굴이 곱고 자태가 아름다웠다.

그들이 하루는 그 근처 못가에 나가 놀다가 해모수왕을 보고 즉시 수중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왕은 말채찍으로 땅을 그어 방을 만들고 자리를 베풀어 그 용자의 염려(艶麗)한 유화를 유치(誘致)하여 비를 삼으려 하니

하백이 처음에는 크게 노하여 사자(使者)를 보내 그 무례함을 힐책하더니

왕을 용궁에 맞아 앉히고 여러 가지 행한 이적이 분명 천제의 아드님인 줄 안 뒤에는 예를 갖추어 성혼하였다.

뒤에 왕은 유화부인을 버리고 홀로 용거에 몸을 붙여 하늘에 올라가거늘

하백은 그 장녀가 이미 임신된 고로 이것이 가문에 큰 욕을 끼친 것이라 생각하여

끄나풀로 그 주둥이를 매어 잡아당기어 그 길이가 석 자나 늘어나게 하고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 귀양 보내었다.

이때 동부여왕 김와(金蛙)가 고기잡는 이의 고함을 듣고 쇠그물로 잡아내게 하였더니

비로소 잡고 보니 한 여자아이, 세 번이나 그 늘어진 주둥이를 문질러 내리니 그제야 말문을 연지라,

왕은 하느님의 자비(子妃)임을 알고 깊은 방 속에 가두어 두었더니 일광이 비치든지 하면 몸을 피하고

그러면 해그림자가 또 따라가 비치고 이러하여 애를 배었다.

신작(神雀) 4년 4월 어느 날이다. 이 유화부인이 좌액(左腋) 밑으로 알 한 개를 낳았다.

왕이 기괴하여 개와 돼지에게 주니 먹지 않고 노상에 버리니 우마가 피하고 또 들에 버리니

금수가 와 덮어주며 기르고 비록 음침한 날이라도 한 광명이 그 알 위에 나타났다.

왕이 그 알을 다시 그 어미에게 보내어 따듯한 곳에 두었다니 한 옥동자가 그 알 속에서 나왔다.

울음소리가 웅장하며 골격이 비범하며 한 달도 못되어 말을 할 줄 알았다.

점차 장성함에 ‘활을 잘 쏜다’하여 이름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다.

이 아이가 후일 왕국에 고구려 왕국을 건설한 시조 동명성왕이 된 것이다.

 

 

 18.

백두산 산 동쪽에 포고리산(布庫里山)이 있고 그 아래에 못이 있어 포륵호리라 칭하는데

옛날 이곳에 은고륜, 정고륜, 불고륜 자매 세 천녀가 그 못에 내려와 목욕하다가

마침 한 신작(神鵲)이 주과(朱果) 하나를 물어다가 막내 불고륜의 옷에 떨어뜨린지라

막내가 그것을 보고 집어서 입에 넣으매 곧 삼키어져서 바로 뱃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목욕이 끝나매 하늘로 올라가려 한즉 막내만은 날라지지를 못한지라 두 형의 말이

"너는 주과를 먹어 아이를 배인 까닭으로 섭섭하나 몸을 푼 뒤에 돌아오라."

신신 부탁하고 둘이만 날아올라갔다.

막내 불고륜은 눈물을 머금은 채 떨어져 있다가 만삭이 되매 훌륭한 한 옥동자를 낳았으니

고고의 소리를 내면서 말도 하고 걸음도 걸으므로 하루는 전자(前者)의 내력을 말하고

이 물만 순류하여 내려가면 거기에 국토가 있으리라 하고 작은 배 한 척을 준 뒤에 그 천녀는 그만 하늘로 올라갔다.

이것이 이백여 년 간 중원에 군림한 청조(淸朝) 창업의 국조 누르하치(國祖)의 출생한 내력으로

그 건국신화가 이상하게도 고구려와 거의 같게 된 것은 우리에게 일종 흥미를 주게 된다.

 

 

 19.

청석봉의 웅자(雄姿)

 

서기전 17세기경 수립되었다가 서기전 11세기경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멸망한

은(殷)나라의 시조 설(契)은 은설(殷契)로도 불린다.

사마천 <사기>(史記) ‘은(殷)본기’에서 ‘은나라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簡狄)은 유융씨(有女戎氏)의 딸로서

제곡의 두 번째 비(妃)였다.

세 사람이 목욕하러 갔을 때 검은 새(玄鳥)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삼켰더니

임신하여 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은나라의 실재를 부인하던 중국학자들은 하남성(河南省) 은허(殷墟)에서 대량의 갑골문이 출토되자

은의 건국민족에 대해 탐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사년(傅斯年)은 1920년대 은허 발굴을 주도했는데 그는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에서

은설(殷契) 사화를 실으며 '이러한 난생 설화는 동북민족과 회이(淮夷)의 신화'라면서

논형(論衡)에 나오는 탁리국(부여) 시조 동명과 <위서>의 고구려 시조 주몽,

그리고 고구려 '호태왕비'의 시조 추모왕의 난생설화를 원문대로 실어

은과 부여·고구려의 시조설화가 같음을 보여주었다.

청나라 강희제의 명으로 아계(阿桂) 등이 1778년 완성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도 마찬가지다.

‘장백산 동쪽에 포고리산이 있고 그 아래 포륵호리(圓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서로 전하기를 천녀(天女)가 목욕하러 왔다가 신작(神鵲)이 입에 문 붉은 열매(朱果)를 막내의 옷에 놓았는데,

막내가 입에 물자 홀연히 뱃 속으로 들어와 한 남아를 낳았다’ 는 것이다.

이 설화는 <청태조무황제실록>(淸太祖武皇帝實錄)에도 실려 있다.

근래 중국에서 출간된 <사기해독>(史記解讀)이나

갑골문 연구자인 맹세개(孟世凱)가 출간한 <하상사화>(夏商史話)는

은나라를 이인(夷人) 또는 동이족의 가지(分支)라고 쓰고 있다.

 

 

 20.

모두가 흘러가버린 설화들이지만, 오늘도 백두산 천지 기슭에서 말없이 피어나 천지 맑은 물을 굽어보는

저 호범꼬리 야생화는 그 옛적의 전설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가슴속에는 저 물위에 피어나는 구름들처럼 역사의 심연에서 피어나는 황홀함이 피어나는데

말을 몰고 여기까지 올라와 푸른 물을 굽어보며 굳이 제세의 염을 굳혀보던 우리 선인들의 모습이

자꾸만 천지 물 위에 오버랩 된다.

호방하고 호탕하고 늠름하며 멀리 내다보던 우리네 선조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여기까지 오면서 본 장백 산하의 골짝들엔 조선족이나 만주족보다도 더 많은 한족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21.

저쪽 사람들 사이에 하얀 목책이 중국과 북한의 경계지점이 된다.

전에는 5호경계비가 돌비석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사람들 통행을 제한하기 위해

경계비를 제거하고 목책을 설치하는 중이다. 이제부턴 이쪽 북한구역으로 건너오기도 힘들 판,

뒤편으로는 옥주봉의 시커먼 모습이 보인다.

 

 

 

22.

천지 앞에서의 인증샷, 두 모녀의 포즈가 희한하다.

아래 지도는 인터넷에서 얻어온 백두산 개념도이다.

 

 

 

 

백두산 천지 주변 약도

 

 

 

Rainbow Song / Ralf Eugen Bartenbach